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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뒤의 재벌 (경제 권력, 강병욱, 2025)

by 뽀숑맘의 재테크공부노트 2025. 8. 19.

『재벌 뒤의 재벌』(강병욱 저, 여림카디널)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 경제의 전면보다 훨씬 깊숙하고 은밀한 권력 구조를 파헤치는 책이다. 재벌 총수나 언론에 자주 노출되는 금융 인물 외에도, 실질적으로 자본과 시장을 움직였던 ‘그림자 권력자’들의 실체를 조명하며, 이들이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로 풀어낸다. 사채 시장의 전설, 비공식 투자자들, 부동산 거물, 선물 옵션의 제왕 등 다양한 인물군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독자에게 “보이는 경제가 전부가 아니다”라는 통찰을 전해준다.

 

재벌뒤에재벌

사채와 현금 권력의 실체 (단사천, 백 할머니, 남상옥)

『재벌 뒤의 재벌』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인물은 이른바 ‘현금왕’으로 불린 단사천이다. 그는 전성기에는 삼성 이병철이나 현대 정주영에게까지 현금을 빌려주던 인물로, 전화 한 통이면 대기업 총수가 벌떡 일어나야 했을 정도의 막강한 자금력을 갖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 하루에 동원할 수 있는 현금이 60억 원, 1980년대에는 3,000억 원에 이르렀다는 기록은 당시 한국 경제의 자금 순환이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반증한다. 이와 더불어 같은 이북 출신의 ‘백 할머니’는 명동 사채 시장에서 전설적인 존재로, 수익률 높은 가치주 중심의 투자를 실천했고,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녀는 정석 투자 원칙을 고수하며 시장을 관망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또한, 삼화 재벌 창업자 남상옥은 단사천처럼 정치권과의 밀접한 관계를 활용해 경제권력을 획득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박정희와 김종필에게 900만 환이 넘는 현금을 지원하며 국가재건최고회의 자문위원으로까지 활동한 기록이 있으며, 이는 단순한 자산가가 아닌 권력 설계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주식과 부동산, 거물들의 투자 생태계 (광화문 곰, 백 할머니, 박옥성)

책의 중반부에서는 ‘광화문 곰’으로 불린 자산가가 세형상사를 설립하고 주식시장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례가 등장한다. 그는 하루 거래량의 30%를 차지하며 시장을 움직였고, 건설주 상한가 주문도 가능할 정도의 자금을 갖고 있었다. 당시 재산은 삼성 이병철과 비슷한 5,000억 원으로 추정되며, 주식 시장의 큰손이 어떻게 형성되고 몰락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한편, 칠산개발 박옥성은 중앙정보부 시절 이후락의 운전기사로 활동하며 차명으로 땅을 매입했다는 의혹이 있으며, 1970년대 강남 부동산의 초기 개발과 직결된 인물이다. 그의 매입 토지 가격은 4,000만 원 정도였으며, 당시로선 고위직 공무원조차 접근하기 어려운 자산 규모였다. 이들 외에도 부동산 투자자 단재완, 김대중, 민병길 등은 강남 개발 호재를 활용해 급속도로 부를 축적했으며, 이 책은 그들이 어떻게 정보를 취득하고 투자로 전환했는지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금융 실명제, 외환위기, 그리고 시장의 또 다른 지배자들 (장기철, 김형진, 선경래)

『재벌 뒤의 재벌』 후반부에서는 금융 자유화 이후 새로운 형태의 경제 권력이 어떻게 등장했는지를 보여준다. 목포 출신의 ‘세발낙지’ 장기철은 선물 시장의 40%를 혼자 거래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시장을 좌지우지했던 인물이다. 그는 외환 위기 이전에 지방지점으로 내려가 수익을 극대화했으며,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에 소개될 만큼 국제적인 주목도 받았다. 또한, ‘백한 바퀴’ 김형진은 금융 실명제 시행 시 사채 시장의 현금을 세탁해주는 방법으로 수수료를 챙기며 자산을 불렸다. 사채 자금의 흐름, 비공식적인 경제 활동의 내부 구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마지막으로 ‘슈퍼 메기’ 선경래는 옵션 양매도 전략으로 매년 20~30%의 수익률을 기록하고, 2008년 금융위기 당시 1조 원을 벌었다는 소문까지 나왔던 인물이다. 그는 현재 대부분의 자산을 국채에 투자하며 은둔 중이라고 전해지는데, 이는 현대의 자산가가 어떻게 리스크를 회피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책은 단순히 ‘부자 이야기’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도와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틈새에서 자산가들이 어떻게 기회를 포착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재벌 뒤의 재벌』은 한국 경제를 움직인 숨은 실세들의 실체를 통해 ‘보이는 경제’ 너머의 진실을 조명하는 귀중한 책이다. 단사천, 박옥성, 장기철, 선경래 등 이들의 이야기는 한국 경제사에서 결코 사소한 외전이 아닌, 실제 판도를 바꿨던 본류였다는 점을 일깨운다. 자산과 권력은 때때로 제도권 밖에서 더 강력하게 작용해 왔으며, 이 책은 그 사실을 충실히 드러낸다. 경제를 보는 눈을 한 단계 넓히고 싶은 독자에게 강력히 추천한다.